‘Bushido(武士道), The Soul of Japan‘을 세계에 알린 니토베이나조(新渡戸稲造)

카테고리 없음|2020. 10. 30. 18:04

니토베이나조(新渡戸稲造) 

 


영어로 ‘부시도(Bushido)’라고 하면 영어권의 웬만한 식자층은 모두 이해할 정도로 세계화된 일본어다. 이 단어를 세계에 알린 이는 일본의 옛 지폐 5천엔권의 인물인 니토베이나조(新渡戸稲造)다. 

1862년 모리오카(盛岡) 번사(藩士)의 셋째로 태어난 그는 13살 때 도쿄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뒤 “Boys be ambitious!”라는 명언을 남긴 윌리엄 클라크로 유명한 삿포로농학교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귀의한다. 이어 22살 때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에 진학하고 이어 관비로 독일 할레대학에 유학한다. 그는 1891년 29살에 되던 해에 미국인 메리와 결혼하는 등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국제화로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다. 그는 미국에서 연구에 힘쓰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건강을 해쳐 요양을 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영어로 펴낸 책이 ‘Bushido:The Soul of Japan’다.

니토베이나조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1889년 벨기에의 한 법학자와 종교를 화제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벨기에 법학자는 니토베에게 “당신네 학교에는 종교 교육이라는 게 있습니까? 라고 물었고 이에 대해 없다고 대답하자 벨기에인은 종교교육 없이 어떻게 자손에게 도덕을 가르칩니까?라고 되물었다. 니토베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일본인에게 도덕교육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부시도(武士道)아닌가!  

그리고 이듬해인 1900년 니토베는 ‘Bushido:The Soul of Japan’을 출판했다. 부시도의 역사와 실태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교의 7가지 덕목에 입각해 일본의 정신인 야마토타마시이(大和魂)에 대해 외국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명했다.

니토베는 저서에서 부시도란 지식이 아니라 실천을 추구하는 것(知識ではなく、実践を求めるもの)이라는 정의를 내리면서 유교의 덕목과 연결해 부시도를 쉽게 풀이하고 있다.

인(仁)은 정을 표시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적이라도 상대에게 인정을 베풀 것 
의(義)는 정의로움과 ‘fair play’의 정신. 
예(礼)는 타인에 대한 배려로 상대가 느낄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하는 것.
지(智)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이를 위해 늘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태도. 
신(信)는 강한 신뢰, 일본의 경우 굳이 계약이 없어도 구두 약속으로도 믿을 수 있다는 것.
충(忠)은 강제되는 것이 아닌 자발적인 충성의 발로
성(誠)은 말한 바(言)를 반드시 이룬다(成)는 것으로 한번이라도 말한 것은 목숨을 걸고 지키며 이를 지키지 못하면 죽음으로서 갚는다고 하는 것. 

니토베가 부시도를 출판한 1900년은 日淸전쟁과 日露전쟁의 막간이었다. 또 일본이라는 신흥국이 세계무대에 막 모습을 드러낼 때 이 책은 세계에 ‘일본이란 나라와 국민의 정신세계는 바로 이런 것이라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미국에서 처음 출판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아이들에게 권할 정도로 인기를 끈 뒤 이탈리아와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에도 소개되면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다. 

막연히 사무라이의 나라로만 알려진 일본이 근대국가가 되자 기독교 정신과 기사도에 바탕을 둔 서구의 규범을 경험했던 니토메이나조가 나름대로 사무라이정신에 대한 생각을 집대성한 것이 ‘Bushido:The Soul of Japan’였던 것이다. 

니토베이나조는 부시(武士)의 궁극적인 이상으로 “최선의 승리는 피를 흘리지 않고 얻은 승리”를 꼽고 있다. 그에 따르면 부시도는 칼을 다루는 사무라이의 사상이라는 점이 부각되면 호전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부전(不戰)의 사상이 요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니토베이나조는 1932년경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군부에 경종을 울린다고 해서 비난을 받았고 친구도 잃었다. 당시 일본은 중국을 침략해 만주국을 지배했는데 미국에 머물던 그는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국제연맹사무차장에 취임해 평화의 길을 모색했지만 1933년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곧바로 전쟁으로 치닫게 됐고 그는 같은 해 캐나다에서 쓰러져 일생을 마쳤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에 대한 군사적 무장해제를 진행하던 연합군 사령부(GHQ)는 부시도(武士道)가 군국주의와 관련돼 있다면서 관련된 서적과 영화를 금지하기도 했다. 부시도(武士道)에 대한 관점은 시대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한 장면이다. 

이후 니토베이나조의 부시도는 영화배우 톰크루즈가 라스트 사무라이를 제작하기 전에 열독했다고 해서 인기를 끌었고 리덩후이 전 타이완총통이 해설서를 출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부시도(武士道)는 현재 일본경영대학원의 리더쉽 과정에서 흔히 필독서로 선정되곤 하는데 에도시대에 비판적인 일부 역사학자들은 부시도(武士道)가 니토베이나조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는 시각도 제기한다. 에도시대의 부시(武士)들은 전국시대 선조들의 유족연금에 의존해 먹고사는 연금생활자로 군인으로서나 관료로서나 무능했던 존재라는 주장이다. 에도시대만 해도 ‘부시도(武士道)’라는 단어조차 잘 쓰이지 않았는데 메이지시대 들어서 니토베이나조가 서양의 기사도와 비슷한 것이 일본에도 존재했다는 식으로 ‘부시도(武士道)’라는 이미지를 가공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니토베이나조가 처음으로 세계에 알린 ‘부시도(武士道)’는 이미 일본의 정신세계와 도덕률을 상징하는 것으로 확고하게 뿌리내린 지 오래다. ‘부시도(武士道)’이외에 일본사회가 가지는 특유의 강점을 설명할 다른 논거가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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