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의 아라시야마(雨中嵐山) 저우언라이의 추억이 깃든 도시
한국인도 즐겨 찾는 일본의 관광지 쿄토 서북부의 아라시야마(嵐山) 카메야먀공원에는 빗속의 아라시야마(雨中嵐山)라는 시비가 있다. 중국의 총리를 지냈던 저우언라이가 일본유학생활을 마치고 1919년 4월에 귀국하기 전 쿄토를 유람하면서 남긴시다.
雨中二次遊嵐山
両岸蒼松,夾着幾株桜。到尽処突見一山高, 流出泉水緑如許,繞石照人。
瀟瀟雨,霧濛濃; 一線陽光穿雲出,愈見姣妍。
人間的万象真理,愈求愈模糊;
模糊中偶然見着一点光明, 真愈覚姣
빗속에 두 번째로 아라시야마를 노닐다.
강둑의 양쪽으로 푸른 소나무 그 사이를 비집고 있는 몇 그루의 사쿠라
길이 끝나는가 싶더니 산이 높이 솟아 있네,
흐르는 샘물은 푸르름이 넘치고 돌 사이를 굽이치며 사람을 비추네
부슬 부슬 내리는 비에 안개가 자욱하고, 한줄기 햇빛이 구름을 뚫고 나와 볼수록 아름답네.
인간사 만상의 진리는 찾으려 할수록 모호하네,
모호한 가운데 우연히 한 점의 광명을 보니 참으로 아름다움을 느끼네,
저우언라이의 이 시는 그가 귀국한 뒤 잡지 ‘각오’(覚悟)창간호에 게재됐고, 시비는 1978년 일중평화우호조약체결을 기념해 쿄토의 여러 단체들이 건립했다. 이듬해인 1979년에는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鄧頴超)가 시비제막식에 참석했다. 저우언라이가 비내리는 날 아라시야마의 소나무와 사쿠라, 푸른물과 산의 아련한 아름다움을 노래한 이 시비는 일중우호의 상징으로 그동안 요승지(廖承志)와 화국봉(華国鋒), 보이보(薄一波), 조자양(趙紫陽), 호요방(胡耀邦), 원쟈바오(溫家寶)등이 방문했다.
사쿠라와 저우언라이 총리의 인연은 깊다. 토쿄도 하츠오지시(八王子市) 소카(創價)대학교에는 저우언라이의 사쿠라(周樱)라는 팻말이 서 있는 사쿠라나무 한그루가 있다. 소카학회, SGI의 창시자인 이케다 다이사쿠(池田 大作)와 저우언라이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식수한 사쿠라나무에 저우언라이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소카학회(創価学会)의 창시자인 이케다는 일중우호를 위해 1971년 공명당 대표로 중국을 방문했고 저우언라이의 환대를 받았다. 이케다에게 깊은 정을 느낀 저우언라이는 1974년 병석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회견을 하기도 했다. 당시 이케다는 50년전 저우언라이가 사쿠라가 만개했을 때 일본을 떠났을때의 정취를 다시 느끼도록 일본방문을 권유했으나 저우의 건강악화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케다는 아쉽다면서 사쿠라가 만개한 모습을 그린 영화난만(樱花烂漫)이란 그림을 저우에게 선물해 병실에 걸어놓게 된다. 저우가 숨진뒤 이케다는 일본에 유학온 중국학생들로 하여금 일본학생과 함께 저우총리를 기리는 사쿠라 묘목을 교정에 심도록 하고 여기에 저우언라이 사쿠라(周樱)란 팻말을 세운다.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는 1979년 4월에 숨진 남편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일본을 방문했고 이케다는 직접 두 그루의 사쿠라 묘목을 심고 주씨부부 사쿠라(周夫妇樱)로 명명했다.
이후 1987년 이케다 다이사쿠는 저우언라이를 회고하며 ‘영화연’(樱花缘)이란 장시를 지어 덩잉차오에게 선물한다.
时去时来, 世事变幻, 唯有樱花因缘而倍增光辉, 告诉人们友谊万世常在。
年年岁岁花开时, 人们赞颂, 人民的总理和人民的慈母, 光辉的一生。
我也赞颂, 心田中友谊的樱花, 永远盛开。
저우언라이는 사쿠라를 유독 좋아했던 것 같다. 저우언라이부부는 베이징의 자택 마당에 사쿠라 두 그루를 심었는데 이 가운데 한그루가 고사했다. 그래서 덩잉차오는 부부가 함께 사쿠라나무 아래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지 못했던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이케다 다이사쿠는 저명한 화가를 초빙해 저우부부가 자택 마당의 사쿠라나무 아래 있는 모습을 그리게 한 뒤 이를 1989년 중화인민공화국건국 40주년을 맞아 덩잉차오에게 선물한다. 덩잉차오는 이 그림을 자택 거실에 걸어두고 외국손님이 방문할 때마다 이토록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선물은 받아본 적이 없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중국인이 가장 존경한다는 저우언라이는 사쿠라를 매우 좋아했고 일본은 지금도 이런 저우의 개인적 취향과 일본에서의 인연을 나름 외교에 활용한다. 사쿠라와 저우언라이의 인연은 어느 정도 알려진 에피소드지만 사쿠라를 좋아했다는 이유로 중국인들이 그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