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원孫文과 우메야 쇼키치梅屋庄吉의 신해혁명 지원

카테고리 없음|2020. 10. 13. 19:33



일본은 중국혁명의 요람이었다.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은 흔히 쑨중산孫中山이라고도 하는데 중산은 그의 자字다. 중산中山은 그가 일본에 머무르면서 사용한 ‘나카야마’란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쑨원이 신해혁명을 위해 주로 한 일은 해외화교자금의 조달이었다. 쑨원의 호號는 일선逸仙으로 서구권에서는 쑨이셴孫逸仙의 광동어 발음인 쑨얏센Sun Yat-Sen이라고 하며 그의 삼민주의를 ‘Dr Sun Yat-Sens’ Thought’이라고도 번역한다. 

쑨원은 1894년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고 이듬해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하지만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한다. 그리고 일본에서 자유민권 사상가로도 활동한 미야자키 토텐宮崎滔天과 깊이 교유하며 일본 조야와 재계인맥을 넓혀간다. 쑨원은 미야자키의 소개로 겐요샤玄洋社의 토야마 미츠루頭山満와 만나고 그들 통해 실업가였던 히라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郎의 경제지원도 받는다. 

쑨원이 동맹회同盟會를 결성해 유학중인 쟝졔스와 만난 곳도 토쿄였다. 중국의 국부인 쑨원은 여러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는데 이 가운데 그를 믿고 평생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준이는 우메야 쇼키치梅屋庄吉란 인물이다.

우메야 쇼키치는 일본에서 시작한 영화사업에서 재산을 이루고 그 재산을 쑨원의 혁명사업에 쾌척했다. 중국의 혁명가와 나가사키 출신의 야심만만한 사업가는 그들이 20대였던 1895년에 시작된다. 사진기술을 배우던 우메야는 홍콩의 번화가인 센트럴中环에서 우메야照相館사진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쑨원의 은사였던 의학박사 제임스 컨트리씨가 드나들면서 두 사람을 이어줬던 것이다. 우메야照相館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고 동양의 평화를 주제로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쑨원은 “중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혁명을 일으켜 청나라를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고 이에 대해 우메야 쇼키치는 “자네가 거병하면 나는 재산으로 지원할 것이네”君は兵を挙げたまえ、我は財を挙げて支援す라고 맹약했다.

메이지원년인 1868년에 태어난 우메야는 나가사키 무역상의 아들로 성장했다. 나가사키는 에도시대부터 계속된 해외문물의 출입구였으며 상하이와의 교역창구로 화교들도 많이 진출한 곳이었다. 어릴 때부터 외국문화에 친숙했던 우메야는 14살 때 상하이에 밀항해 아편전쟁이후 서구열강에 의해 반식민지화 된 중국의 모습을 접한다. 

이후 우메야는 사진관 사업을 영화사업으로 발전시켜 대성공을 거둔다. 특히 싱가포르에서 50만엔을 벌어 귀국했다. 당시 영화산업은 최첨단 미디어 사업이었다. 그는 귀국 후 M 파테(프랑스의 파테 필름을 구입한 것이 계기)를 설립한다, 그러다 메이지말기 영화산업에 불황이 닥치자 요시자와吉澤상점, 요코다橫田상회, 후쿠호쿠도福宝堂 등의 영화사를 인수해 일본활동사진주식회사를 설립해 시라세 중위의 남극탐험 기록영화를 만드는가 하면 히비야공원에서의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을 전하는 등 영화제작자로 여러 실험적인 시도를 한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우메야는 약속대로 쑨원에게 아낌없이 보냈다송금방법은 영화필름깡통에 돈뭉치를 넣어 혁명군에게 보내기도 하는 등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우메야 쇼키치는 신해혁명이후 일본에 망명한 쑨원을 숨겨주고 송칭링을 소개해 결혼에 이르도록 한다. 심지어는 결혼 피로연 장소로 자기의 저택을 제공하기도 한다. 쑨원 부부가 중국에 귀국할 때 까지 송칭링은 우메다의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고 틈만 나면 피아노를 쳤다. 이 피아노는 현재 히비야 공원에 있는 쑨원과 그의 일본인지지자들의 교류장소였던 마츠모토로松本楼에 전시돼 있다. 

쑨원은 1925년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동지들이여 혁명을 향해 노력하시요!革命尚未成功,同志仍须努力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우메야는 쑨원센을 기리기 위해 현재가치로 1억5천 엔의 돈을 들여 4기의 동상을 제작해 난징과 광저우, 마카오 황푸에 기증한다. 우메야는 이후 계속 악화된 일중관계의 개선을 위해 힘쓴다. 그러다가 일중전쟁이 시작되기 전인 1934년 쓰러져 65세로 타계한다. 그 때 사업으로 번 돈은 모두 쓴 상태였다. 

우메야가 쑨원의 혁명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쓴 돈은 현재 가치로 1조엔 정도다 그가 생애를 관통해 신조로 삼은 것은 부귀재심貴富在心이었다. 우메야는 명성이나 지위 같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젊은 날의 서약을 중시해 쑨원을 물심양면으로 도와 중국혁명의 연출자로 불리고 있다. 

쑨원과 우메야 쇼키치의 인연은 일중양국 우호의 상징이기도 하다. 국부 쑨원이 일본식 이름인 나카야마中山를 사용하고 일본인 사업가 우메야 쇼키치 그리고 겐요샤의 토야마 미츠루 등과도 널리 교유했지만 그를 친일파라 매도하는 중국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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