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무라 히토시(今村 均いまむら ひとし) 맥아더가 인정한 무사도

카테고리 없음|2020. 11. 2. 20:26


 
GHQ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나는 이마무라 장군이 전범이 된 옛 부하들과 같이 복역할 수 있어 마누스 섬으로 가기를 희망한다는 얘기를 듣고, 일본에 온 후 처음으로 진정한 무사도를 접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곧바로 허가하라고 명령했다.”

 



 1942년 2월 일본은 자원획득을 위해 인도네시아를 침공했다. 네덜란드의 압정에 시달렸던 인도네시아인들은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여겨 환영했으나 이내 실망했다. 점령지를 무력으로 복종시키려는 무단통치를 실시한 것이었다. 

그런데 무단통치에 반대해 유화책을 쓰고 현지인들과 우호관계를 맺은 일본육군장성이 있었다. 바로 제 2차 세계 대전당시 일본군 최고의 덕장이라 불리는 이마무라 히토시(今村 均)다. 

그는 네덜란드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벌이던 수카르노를 석방했다. “일본군에 협력하지 않아도 되니 당신의 정치적 소신대로 행동하라”면서 그를 풀어준 것이다. 그리고 포고령을 내려 현지인들을 탄압하는 것을 금지했다. 

 

 


“점령지 주민의 긍지를 빼앗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긍지를 잃은 민족에게는 멸망밖에는 없다. 우리는 확실히 지금 자바를 점령하고 있지만 그들의 자부심까지 빼앗으면 안 된다.”

 

 

 

 

 

 



인도네시아에서 이마무라 히토시는 선정을 펼쳤다. 파괴된 석유정제시설을 복구해 유가를 네덜란드 통치시대의 반값으로 하고 네덜란드로부터 몰수한 돈으로 각지에 학교를 세우고 일본군의 약탈을 금지한다. 그런가 하면 네덜란드 통치시에 금지됐던 인도네시아 라야(“Indonesia Raya”: 나중에 인도네시아 국가가 된 곡)과 자바섬(Pulau Jawa)같은 곡을 현지인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도쿄에서 음반까지 만들어 주민들에게 전달해 감동을 준다.  

전쟁으로 일본에서 물자가 부족해지자 대본영은 자바에서 생산되는 무명천을 수탈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이마무라는 이를 거부한다, 무명천은 인도네시아 특산품인 바틱의 재료이고, 사망자를 감싸는 수의로 이를 수탈하면 현지인의 생계와 종교를 훼손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대본영에서는 점령지에서 무위(武衛)를 떨쳐야 할 장군이 현지인에게 유화책을 쓴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이마무라의 의지는 완고했고 그는 파푸아 뉴기니의 뉴브리튼 섬에 위치한 1944년 라바울(Rabaul)로 근무지를 옮긴다.  

전쟁 막바지여서 라바울의 분위기 역시 심상치 않았다. 당시 이무라는 라바울에서 자신 휘하의 10만 병력에게 “일본은 일시적으로 전력을 상실하고 있을 뿐 반드시 반격의 기회가 온다”고 훈시하며 사기를 복돋운다.  

전세가 기울어져 연일 미군의 공습이 이어지자 이와무라는 라바울을 사수할 현실적인 계획을 세운다, 400대 이상의 미군기 공습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섬에 총 길이 370km에 이르는 지하갱도를 구축했다. 또 식량 확보를 위해 일인당 200평의 밭을 경작하고 10마리의 닭을 키우도록 했다. 다른 지역에서 보급부족으로 일본군이 패퇴하는 상황에서 식량은 물론이고 요새에 병원과 발전시설, 탄약고까지 갖춰 언제까지라도 버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미군은 피해가 예상외로 클 것을 우려해 라바울 공략을 포기했고 곧 일본패망으로 전쟁은 끝나게 된다. 종전의 소식이 전해지자 라바울에 있는 이마무라 휘하의 청년장교들은 본국이 항복했지만 우리는 무장해제할 수 없으며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이마무라는 “자네들은 라바울에서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그런 우수 인재들이 목숨을 잃으면 일본의 재기는 있을 수 없다. 라바울에서 활약한 자네들이 귀국해 나라의 부흥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종전으로 이마무라는 군법회의에 전범으로 회부된다. 호주측이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과거 이마무라 덕분에 풀려난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주민들이 구명운동을 벌인 결과 금고 10년형을 선고받고 토쿄 스가모(巣鴨)감옥에 수용된다. 

그러나 이마무라는 부하들을 생각한다. 전범이 된 라바울의 수 많은 병력이 포로가 돼 적도의 마누스 섬에서 강제노동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도 그곳으로 보내달라고 GHQ 사령관 맥아더에게 탄원한다. 

종전이 된 해 GHQ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벌이면서 군국주의 정신을 없애겠다며 무사의 상징인 군도(軍刀)를 모조리 수거하던 시기였는데 맥아더는 이마무라 대장이 열대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옛 부하들과 운명을 같이하겠다고 하자 진정한 무사도를 발견했다면서 그의 탄원을 흔쾌히 승낙했다.   

마누스에서 일본군들은 호주군에게 학대를 당했다, 일본군 죄수가 작업을 하고 들어오면 채찍과 몽둥이로 린치를 가하기도 헸는데 이마무라는 호주군과 대화를 하며 포로처우 개선에 노력했다. 호주군도 나중에는 그의 사상과 인품, 철학, 지식에 깊이 감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대의 마누스섬 감옥은 도중에 폐쇄되고 이마무라는 1953년 다시 도쿄의 스가모 감옥으로 수용돼 이듬해 11월 형기만료로 출소한다.  그는 이후에 자택에 작은 다다미방을 근신실(謹愼室)이라 이름 붙이고 전쟁 중에 부하들을 사지로 내몬 것을 반성한다면서 독서와 집필로 여생을 보낸다. 그리고 회고록 같은 저서로 마련된 돈은 전사한 옛 부하들의 가족들을 위로하는 데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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