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민음료 첫 사랑의 맛(初恋の味) 칼피스(カルピス)이야기

카테고리 없음|2020. 11. 2. 20:31

칼피스 カルピス Calpis



일본에 여행을 가게 되면 가장 흔하게 접하는 음료가 있다. 영문표기로는 ‘CALPIS’ 일본어로는 카타카나로 カルピス로 돼 있는 유산균 음료다. 사람에 따라 ‘밀키스’나 ‘암바사’와 비슷한 맛이라고 느끼는 이도 있고 요구르트 희석한 것 같다고 하는 이도 있다. 너무나도 유명해 일본의 국민음료라고도 하는데 처음 등장한 시기가 우리나라에서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이다.  

칼피스의 창시자는 1878년 일본 오사카부 미노시(箕面市)에 있는 쿄가쿠지(教学寺)에서 승려의 아들로 태어난 미시마 카이운(三島海雲)이란 사람이다, 그는 니시혼간지 분가꾸료(西本願寺文学寮)에서 수학한 뒤 불교대학(현재의 龍谷大学)에 편입하자마자 1902년에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간다. 당시 중국대륙은 낭만적인 꿈과 야망을 펼치고자하는 일본청년들에게 동경의 땅이었다.

그가 중국에서 교사생활과 함께 잡화상 사업을 벌이던 1904년에 일로전쟁(日露戰爭)이 발발한다. 미시마는 일본군으로부터 군마(軍馬)조달 의뢰를 받게 되는데 당시 만주의 군마는 오쿠라와 미쯔이 재벌이 독점한 상태라 미개척 지역인 몽골로 눈을 돌리게 된다, 

군마를 구하기 위해 그는 엄동설한에 몽골로 향한다. 이때 그는 몽골의 왕공, 귀족과 인연을 맺게 되고 몽골 유목민의 소울 푸드인 산유(酸乳)를 접하게 된다. 산유를 맛보게 된 그는 긴 여행으로 약해진 위장이 좋아지고 몸과 머리도 맑아지는 것을 체험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일본인들에게 몽골의 유산균식품을 보급하리라 마음먹는다. 

중국대륙의 격변에 따라 사업환경이 어려워지자 귀국한 그는 몽고에서 배운 산유(酸乳)의 연구를 거듭해 1919년 일본 최초의 유산균 음료 칼피스를 내놓는다. 칼피스는 칼슘과 산스크리트어로 최고의 가르침이란 의미의 단어를 합성한 것이다. 각계 각층의 인사와 폭넓게 교류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항상 귀담아 들었던 미시마 카이운은 칼피스로 제품을 명명하면서 작곡가의 의견도 듣는다. “칼피스가 음성학적으로 울림이 좋다”는 아카톤보(あかとんぼ 고추잠자리)의 작곡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筰)의 견해도 수용한 것이다. 

미시마 카이운은 출중한 아이디어맨이기도 했다. 그의 광고기법은 ‘일본기업 커뮤니케이션’의 연구대상이다. 그 시절에 벌써 “광고의 목적은 상품 자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기업체의 이미지를 일반대중의 마음속으로 전하는 것이다.”는 말도 남겼을 정도였다. 

1922년에 사용된 칼피스의 광고 카피는 파격적이었고 카피 결정과정에서 오갔던 대화들도 아주 압권이다. 카피는 ‘하츠코이노아지(初恋の味), 첫사랑의 맛‘이었다. 다이쇼 시절에는 ’初恋‘란 단어는 좀 노골적이어서 입 밖에 내기에 거북스런 느낌이 있었다 

初恋の味는 미시마 카이운이 분가쿠료(文学寮)시절 후배인 코마키(驪城(こまき)가 ‘달콤하고 시큼한 칼피스는 첫사랑의 맛이다’ ‘이걸로 카피를 정하자’라고 제안한 것이 계기였다. 카이운은 당초 터무니 없는 제안이라면서 코마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코마키는 다시 카이운에게 “칼피스는 역시 첫사랑의 맛이야. 이 미묘하고 우아하고 순수한 맛은 첫사랑이란 단어가 안성맞춤‘이란 말로 재차 설득했다. 

이에 대해 카이운은 ”자네 뜻은 알겠는데 칼피스는 어린이들도 마셔. 만약 어린이들이 첫사랑의 맛이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면 좋지? 라고 물었다. 그러자 코마키는 “그러면 ‘칼피스의 맛’이라 대답하면 돼, 첫 사랑은 청순하고 아름다운 것이고 여기에는 사람의 꿈과 희망, 동경이 들어있다”고 하자 카이운은 결국 수긍하게 된다.  

初恋の味(첫사랑의 맛)이란 카피는 초기에 도발적이지만 크게 화제가 되고 모던한 것으로 점차 받아들여지면서 일본인들의 마음속 깊이 파고드는데 성공한다.

지금으로서는 흔한 광고방법이지만 미시마는 당시에는 아주 파격적인 대중 참여광고도 도입한다.  동물애호단체와 제휴를 맺고 후지산 정상에서 토쿄 히비야 공원까지 100마리의 전서구를 날린 뒤 도착시간을 맞추는 현상퀴즈 캠페인을 벌인다. 또 동요시인들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해 소학생 동요 콘테스트를 여는가 하면, 히비야 공원에 한 변의 길이가 9미터가 되는 대형 바둑판을 걸고 유명 기사로 하여금 대국을 하도록 하는 이벤트를 벌여 큰 성공을 거뒀다.  

 

 


또 1923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경제공황에 시달리는 유럽의 상업미술가 구제사업으로 칼피스 선전 포스터를 공모해 각국에서 1.400점이 넘는 작품을 접수 받는다. 유럽의 미술가 구제사업이란 취지와 함께 이 같은 이벤트는 유럽에 비해 낙후됐던 일본의 상업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효과도 있었다. 당시 1등상은 500달러, 2등상은 200달러, 3등상은 100달러를 각각 수여했다. 그리고 입선에 탈락한 작품들은 일본내 경매에 붙였고 마련된 돈은  응모자들에게 보냈다.   

미시마 카이운은 평생 국리민복을 하겠다는 신조에 따라 재난 구조 활동에도 앞장섰다.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자 불자(佛者)였던 그는 칼피스를 보시(布施)의 음료로 생각하고 폐허로 변한  도쿄에서 식수를 찾는 아들에게 무상으로 배포했다. 

칼피스를 애용했던 고객에게 보답한다면서 공장에 남아있는 수십통의 칼피스 원액을 물로 6배 희석시킨 뒤 얼음을 넣어 이재민들에게 전달했다. 금고에 있었던 회사비상금도 모두 사용했고 4대의 트럭행렬에 칼피스를 싣고 이재민들 사이를 누볐다. 

그는 84세가 되던 1962년에 전재산을 출연해 미시마 카이운 기념재단을 설립한다. 스스로를 광야에 뿌려진 한톨의 보리로 비유한 그는 “오늘날의 내가 있는 것은 나의 선배, 친구 지기, 그리고 칼피스에 대한 국민 대중들의 아낌없는 성원 덕분이다. 따라서 내 것이 아닌 재물은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재단은 미시마 카이운의 유지에 따라 자연과학과 인문과학분야 연구자들에게 학술상을 꾸준히 수상하고 있다. 

칼피스 회사 자체는 2007년 조미료 업체 아지노모토에 인수됐다가 2012년에 다시 아사히 맥주의 지주회사인 아사히 홀딩스에 인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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