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를 싫어했던 전차장교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

카테고리 없음|2020. 11. 6. 00:22

시바 료타로 司馬遼太郎. 

 


료마가 간다 竜馬がゆく、언덕위의 구름 坂の上の雲、타올라라 검 燃えよ剣、고개 峠、올빼미의 성 梟の城 등 수많은 작품이  1 억 권이 훨씬 넘게 팔려 초베스트셀러 저자로 유명한 시바 료타로 司馬遼太郎 만큼 전인미답의 족적을 남긴 일본작가는 없다. 

 


역사속의 인물을 발굴해 전후일본사회에 크나큰 영감을 준 작가인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을 흔히 시바 사관司馬史觀이라고 한다. 그의 작품은 주로 일본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소설이란 장르의 특성상 픽션도 가미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른바 시바 사관은 엄밀히 말해 역사를 조망하는 시바 료타로의 경향일 것이다. 

 


일본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메이지와 쇼와가 확연히 다르다. 일로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승리와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세명을 주인공으로 한 언덕위의 구름에서 보듯 메이지 시대는 밝고 근대국가를 만든 영광스러운 시대로 보는 반면, 쇼와는 어두운 쇼와라고 해서 정신병동이나 다름없다고까지 비판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그가 왕성하게 소설 집필을 하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동으로 일본 현대사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분위기가 강했다. 아베 신조 총리가 2019년에 전후외교의 틀에서 벗어나 보통국가로 향한다는 움직임을 보일 정도니 6,70년대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시바 료타로 개인의 경험일 것이다. 오사카 대학 몽골어과에 재학중이던 시바는 일본군이 과달카날에서 미군에게 패한지 반년 뒤 전황악화에 따른 병력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학도출진을 시작하게 되는 바람에 징집된다. 병과는 전차병과였다. 

시바 료타로는 ‘역사와 관점歴史と視点이란 저서에 있는 <전차의 벽 속에서戦車の壁の中で>, <전차 그 우울한 탈것戦車・この憂鬱な乗物>, <돌로 만든 토리이의 각질石鳥居の垢>란 글에서 전차에 관한 에피소드를 적었다. 

“내게 온 작은 징집통지서에는 전차병이라고 적혀 있었다. A는 물끄러미 그 종이쪽지를 보더니 이윽고 전차라면 죽는다, 백퍼센트 골로 가게 된다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부친은 수의獣医 장교여서 다소나마 군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비행기라면 그나마 괜찮다. 전차라는 것은 전장에 나타나면 반드시 전멸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A가 말한 대로였다.”

당시 일본의 주력전차는 구칠식 중전차九七式中戦車, 줄여서 치하샤チハ車라 불렸다. 시바 료타로는 이 전차가 화염병에 맞으면 불이 붙는 가솔린 엔진이 아니라 디젤전차로 동시대 최고의 전차지만 최대 결점은 적전차에 대한 방호력도 공격력도 없는 그야말로 전쟁을 치룰 수 없는 전차라고 비꼬았다.

전차의 방어강판이 얇으면 야마토 타마시이大和魂로 메우면 된다, 강판이 얇으면 기동력이 있고 화력이 약해도 적 보병이나 포병은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본군부의 무모함에 혀를 내둘렀다는 식으로 회고했다. 전차가 어떻게 운용돼야 하는지 이해하는 참모본부의 간부가 없었던 것 아니냐고도 했다.

돈도 자원도 없이 목숨을 초개처럼 버려야 한다는 환상이나 다름없는 정신력으로 해군은 영국, 미국과 견줄 만하고 육군은 소련과 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한 세계역사상 이토록 처절하게 기지개를 편 일본 같은 나라는 없었다고 쇼와시대를 비판했다.

시바 료타로는 병사훈련을 마치고 갑종간부후보생에 응시, 합격해 44년 4월 만주 스핑四平의 전차학교에 입학해 12월에 졸업한다. 시바는 군인이 됐지만 동작이 굼떴고 총검술도 마지 못해하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문과여서 기계치였고 전차조종도 가장 서툴러 차량을 고장내는 일도 잦았다. 군인답지 않은 보통의 청년 모습이었던 그는 늘 웃음을 잃지 않았고 언젠가 전차 1개 소대를 맡아 몽고의 마적대장이 되겠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전차학교 졸업후 성적이 좋지 않아 만주 무단쟝의 쿠루메 전차 1연대의 소대장으로 배속되는데 전쟁 막바지여서 운 좋게 실전에는 투입되지 않고 본토의 토치기현栃木県 사노시로 전근을 하게 된다. 이 때가 미군의 토쿄상륙설이 나돌던 전쟁 막바지로 이른바 본토결전을 준비하던 때였다. 

미군이 만약 토쿄에 상륙하면 시바의 전차부대는 토쿄로 이동해 미군을 공격한다는 작전계획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토쿄에서 피난 나온 민간인들과 토쿄로 향하는 전차부대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기 마련이다. 시바 료타로는 이 때 민간인과 혼재돼 옴짝달짝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상관에게 물었더니 그 상관은 그러면 “깔아뭉개고 간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얇은 장갑의 허술한 전차 전력을 정신력으로 메우고 작전을 위해서는 민간인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쇼와시대의 군인관에 시바 료타로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메이지 시대의 리얼리즘이 사라진 쇼와시대에 일본이 일종의 낭만주의에 빠져 무모한 전쟁에 돌입했고 일본전체가 거대한 정신병동이라는 것이 시바 사관이다.

 


시바는 1968년 소설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을 연재할 때부터 ‘노몬한 사건’을 다음작품의 소재로 채택하겠다고 결심한다. ‘노몬한 사건’ 같은 바보 같은 전쟁을 하는 일본과 일본인은 무엇인지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이 5년전 그 전차부대에 배속됐으면 끔찍하게 전사했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시바는 일본군의 89식 중전차가 소련군 BT 전차에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생각하고 방위청 전사실을 방문해 자료를 모으고 집필준비에 들어간다. 소련전차에 참패했는데도 그 교훈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으며 자신이 일본인인 것이 싫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노몬한 전투 참패 책임을 지고 전역당한 뒤 온천을 운영하던 스미 신이치로須見新一郎 전 대좌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쓰기 위해 그를 열심히 취재한다. 그런데 스미 신이치로가 극도로 혐오한 전 총참모부 간부이며 이토츄 상사 부사장 세지마 류조瀬島龍三와의 대담기사를 시바가 문예춘추에 내자 이에 발끈해 시바 료타로에게 앞으로 당신의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며 단교를 선언한다. 그리고 그 사이 소련의 일로전쟁 비밀문서가 해제되면서 노몬한 전투와 관련해 시바가 상정했던 팩트 자체가 상당부분 오류로 밝혀진다. 결국 시바 료타로는 노몬한 전투의 작품화를 단념하게 된다.

 


시바 료타로는 전차를 싫어한 전차장교였다. 군인같지 않은 군인으로 전형적인 오사카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작가로서 매우 촘촘한 취재를 했지만 현대군사지식에 대해서는 그다지 정통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언덕위의 구름에서 노기 마레스키를 우장愚將으로 묘사한 대목에 대해서는 많은 전사가들이 사료를 근거로 사실과 틀리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뭐니 뭐니 해도 그가 없었더라면 묻혔을 역사인물을 발굴해 국민통합에 이바지한 점이다. 사카모토 료마도 시바가 없었더라면 그저 수많은 위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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